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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평신도 운동의 신학적 고찰
기독인연대  2004-11-19 00:00:00, 조회 : 4,333

기독교평신도운동의 신학적 고찰



안창도 하남YMCA추진위원회 총무
(기독교평신도연대 실행위원장)


1. 교회의 본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바울 이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학적 교리가 되어 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함은 교회의 주인은 예수라는 말과 같은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섬기는 신도들의 공동체라고 할 것이다.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은사(카리스마)공동체를 이루는 제체들이다. 교회는 성전공동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머리로 하는 몸(교회)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평등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영, 생명의 영이 임재하는 민중의 친교공동체이니 교회는 형식주의나 율법주의 혹은 관료주의와는 상관없는 인격공동체이다.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토대로 한 성령공동체이다.

한백교회의 김진호 목사(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회원)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정전화’라는 성전종교에서 ‘유랑’이라는 초기 예수운동의 모형에서 찾고 있다.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은 일상적 윤리로부터의 과격한 단절을 감행하는 데 용이한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예수 운동에서 혁명적 급진주의로 나타나는데, 그 사상적 기초에는 민중주의적인 급진적 종말론 전통이 있었다. 종말론은 시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험 양식으로, '종말의 때의 임박성'을 공유하는 집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때의 지연'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며, 이러한 위기는 신앙 유형의 전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주' 유형의 신앙이 발전할 계기가 마련된다.

정전화는 대중의 의미 해석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고, 공동체의 엘리트들에게 의미 독점권을 위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엘리트들은 정통적 텍스트들인 정전을 전유할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한 의미 재현 과정인 예전을 장악하는 종교귀족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탄생에 비판적 요소는 제거되거나 외부로 추방되었으며, 결국 교회 형성 과정에서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배제되고, 기성 문화에 대해 일탈적/해체적인 에토스는 신앙과 무관한 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배타적인 정착 문화를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성직자 중심주의적인 종교제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어 사회적 관계의 영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면서 다른 권력, 즉 교회 외부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른바 교권과 속권이라는 두 권력 유형은 배타적이고, 따라서 상대방을 하위에 두어야만 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권이 속권과 수위권을 놓고 경쟁하는 중세기에 이르면 최후의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복주의적 담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적으로 정향된 교리의 형성 과정과 맞물린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의 실천 원칙을 구성하게 되는데, 하나는 교회가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열세일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엔 교회는 강력한 개입주의를 통해 수위권을 한껏 발휘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엔 상호불간섭주의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실천은 어느 한 편으로 한정되기보다는, 세속 권력과 갈등하는 동시에 다양한 경로로 제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교회는 기본적으로 속권과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 서로 공조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려면,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교회로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정주'의 신학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랑이 배제된 정주, 斷이 배제된 公의 실천은 신앙의 제도화 과정에서 패권주의, 승리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신앙은 '차이'를, 낯설음을 포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 몸과 지체의 레토릭은 차이를 전제로 하는 연대의 에토스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과제가 외부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예수 공동체의 형성에 초점이 있었다면, 지구화 시대를 맞은 오늘 우리는 자본과 주류 교회의 무신성을 극복하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서로 격리된 예수 공동체와 세계를 다시 연계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몸-지체 레토릭은 민족공동체 나아가 지구촌공동체에서 차이와 연대의 신학적 레토릭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2. 하나님 나라운동과 교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왔다.”라는 예수의 선포는 아직도 유효한가? 그동안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대신해 왔다. 중세는 교회가 천년왕국설에 의해 스스로를 주님의 왕권을 대체한 세력으로 나서기도 했다. 19세기의 서구 문화기독교는 근대의 발전을 하나님나라를 향한 구속사와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칼 바르트 등에 의하여 낯선 것으로 대치되었고 적어도 자본주의 발전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라가츠 등 초기 기독교사회주의운동가들은 철저한 사회주의만이 하나님나라에 비견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은 생태신학, 생명신학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회학적 상상력에 불을 붙이고 있다.

어찌 되었든 교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도 주님의 왕권을 대신할 수 없음도 자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지 세속세계를 지배할 의인들의 관료집단(정부조직체)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깨어 있을’ 의무만을 받고 부름에 나선 그리스도의 제자공동체, 성령공동체이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전국민의 하나됨의 실체를 경험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는 개인이나 개교회를 넘어서는 민족적, 지구적, 우주적(!) 집단체험에 해당하는 사건이므로 현재의 교회의 자기 집착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타인에 대하여 무한히 개방된 자세, 어느 누구와도 하나될 수 있는 열린 심성, 시민사회에서 타자를 위한 섬김과 낮춤을 견지한 성숙한 시민으로서 교회의 희망을 온전히 사회화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이라야 하나님 나라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더욱 역사적 종교이며 역사 속으로 철저히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이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를 창시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른다. 결국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대로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 하는 목적지향적 집단이라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변혁적 과제를 분명히 제시하셨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윤색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비화되었으나 오히려 그리스도는 가장 현실적인 삶(정치적인 삶)을 사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이 종교적 수사학으로 치장되어 있고 인간적 욕망체계와 전혀 상관없는 차원에서 세상의 변화를 요구하였다고는 하나 분명 그분은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처형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를 국가권력과의 상관관계로만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일정 부분의 규모를 갖는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교회정치가 있으며 회사에도 자본가와 경영자 그리고 노동자간의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을 조직화하면 그것이 정치가 되는 것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개인적 영성이 현실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일컫는 좋은 비유라고 할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는 예수공동체인 교회는 세속권력과 긴장관계를 갖는다. 이것을 보수적인 성령파 기독교도들은 영적전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는 인간의 육적 욕망체계를 거슬러서 가능하다. 그것은 현재의 인간의 욕망체계의 총화인 즉 국가권력체계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온 우주의 영역에서부터 인간 개인의 욕망의 영역에까지 그 관심영역이 무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항시 공동체적 사고를 갖게 된다. 그러한 대안공동체는 당대 사회와 차이를 갖고 비판적 예언자적 성격을 지닌다. 교회는 NGO가 아니면서 또한 NGO가 된다. 교회는 오늘날 시민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 안에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한 책임있는 공동체로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는 당시 혁명집단이었던 제롯당(열혈당)과 같은 체제전복적인 무장투쟁을 선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예수가 당시 지배세력과 타협했다는 근거도 별로 없다. 그가 가끔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던 것은 자기의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배려이지 기존의 지배세력을 두려워한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기의 때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베드로(칼을 소지한 것으로 보아)나 유다와 같이 제롯당원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새로운 시오니즘 국가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해방(구원)이라는 더 거대한 차원의 프로그램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속적 권력의지가 넘치고 과격하기까지 한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을 예언하자 만류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권력의지에 가득차 있던 베드로야말로 예수께서 보면 사탄의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는 세속권력을 추구했다기 보다 인간의 권력의지를 해체하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우리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운동의 주요 방향을 이미 알고 있다.

즈불론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서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다가 왔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4:15-17)

이런 예수 활동의 출발을 보아서도 예수는 기존 주류지배세력보다는 변방의, 소수자들과 함께 생활하셨고 또한 그들의 편에 서서 마지막을 십자가에서 마감하셨다. 또한 그가 부활하셔서도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 왜 그는 갈릴리라는 변방을 그의 하나님나라 선포의 주요 무대로 설정하셨을까? 그것은 예수의 지향점이 세상의 권력의 대극점에 서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도 또한 그러한 것임을 말해 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크고자하거든 섬기라하셨으며, 부자청년에게는 너의 재산을 다 남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다. 이러한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인간의 권력의지, 부자됨을 포함한 욕망체계와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가 바라는 세계가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로서도 이 세상을 구원할 프로그램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에게는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 그 자체였다. 그에게 그 당시 유대의 민중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구속에 얽매인 인간들을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은 기득권 세력의 자기 권력의 유지수단이었다.

죄에서의 구원이야말로 당시 유대민중에게는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율법주의가 온통 지배하는 유대국가에 있어서 죄의식 혹은 정죄는 사람의 생명까지 좀먹고 시들게 했다. 죄인은 유대 민족의 생활세계에서조차 소외당해야 했다. 그가 병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자주 일으킨 것도 그 당시 병든 자들이 죄인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그토록 가혹하여 정신만이 아닌 육적 세계까지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다다름’이 어쩜 근본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겐 주요한 과제이다. 인간구원하면 마치 사회적 구원이나 공동체적 관계망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과연 인간 구원은 인간 내면의 영성에만 관여된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죄는 사회적 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가 본 것은 억압적 사회구조에 의해 ‘죄’라는 올가미를 쓴, 당시의 민중보다도 율법(사회적 구조의 윤리적 토대)을 내세워 민중의 생명을 옭죄이는 율법학자나 바리새파가 더욱 죄 가운데 있음을 간파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해 죄를 바가지로 쓴 민중에게는 그 죄를 바로 사하여 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지배세력들과는 대치전선을 형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인간적 권력의지를 동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기존 사회적 구조에 얽매여 있는 각개인의 심적 뒤틀어짐을 바로 펴시고자 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개인적 결단인 회개가 중요함을 역설하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구체적 결단이 ‘회개’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프로그램으로 예수는 바로 인간의식 중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단순한 의식상태만을 말하진 않는다. 그것이 실천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며 행동의 결과에 의해 마음이 ‘변화’된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했다.(마태3:8) 그 사랑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요한17)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담지해 낼 정치적 사회적 프로그램이 당시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17:16)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여된 이 새로운 메시지 즉 복음(Good news)은 ‘새로운 것(News)'이다. 우리의 죄는 사랑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함으로써 인간적 권력만을 추구하던 당시의 로마의 지배세력들과 그에 투항한 민족의 지배그룹에게 예수로부터 시작된 그 하나님 사랑하기, 이웃사랑하기는 배타적 민족감정에 의존한 민족항쟁 일변도의 정치적 프로그램과는 질적으로 다른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서투른 사회운동이고, 희극적 요소까지 가미된 프로그램이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희극성, 축제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보무도 당당한 준마에 올라탄 권력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온유함의 상징인 어린 노새의 등에 불안하게 얹혀 뒤뚱거리며 성 안으로 들어서는 그분과 종려나무를 흔들어 대는 일단의 무리들은 너무도 우습기 짝이 없다. 거기에서 간절하게 호산나를 외치는 민중들조차도 아무도 그런 희극적 축제에 자기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배신감을 느끼게 될 때까지는. 그는 끝까지 아나키스트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마치 간디와 그 일행들이 한사람 한사람이 몸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소금을 얻으려는 비폭력행진을 멈추지 않았듯이 예수는 당시의 지배권력을 철저히 아나키스트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철저한 반권력의지는 결국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절대의존성에 기인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권력의지는 결국 인간적인 욕망체계에 기인한 것이며 끝임없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자기 우상화의 결과물이니 예수는 인간의 자기애를 마지막까지 거부하며 그 길을 생의 끝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은 그 안에 전혀 낯선 새로움을 잉태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전혀 낯선 것이면서도 옛것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국가도 전혀 낯선 것처럼 혁명적으로 새로워 질 것이지만 그 체제나 권위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그 체제의 기본적 속성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 않은 때문이다. 바울에겐 어쩌면 당대의 국가권력에 대한 체제전복적인 정치투쟁은 하나님 나라운동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간파한 듯하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퍼지고 겨자씨처럼 자라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공동체가 편만한 가운데 구체제 자체를 새롭게 한다. 상한 갈대 하나 꺽으시지 않고 이루려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탓이리라.

바울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제도와 가치가 전적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는 슬픈 사람은 기쁜 척하고 기쁜 사람은 슬픈 척하며 살라고 한 것이다. 세상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전도자의 기사 내용이 바울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신앙에 깊게 파고든 까닭이다. 당시의 율법주의야말로 바울이 해체해야할 당면과제였다. 인간의 욕망체계, 권력에의 의지가 일체 거부된 그곳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율법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이성’에 의해 체계화된 당시의 정치체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한다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신비주의적 전통은 이미 바울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오직 자신의 이성(율법)에 의지하여 세상을 지탱하고자 할 때, 그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설파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당황하게 하시는 전혀 낯선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체험하였다. 그의 이성으론 도저히 그가 왜 유대교의 철저한 율법주의자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의 제자들이 얼마나 율법주의를 경계했는지는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사람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여야 합니다.”(행15:5)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행:10-11)

“성령과 우리는 다음 몇가지 필수 사항 밖에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삼가면, 여러분은 잘 행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행:28-29)


3. NGO로서의 교회의 역할

교회의 사회참여 ― 어떻게 할 것인가 / 이혁배 (성공회대강사/ 기독교윤리)

한국교회의 실천전략

이제 우리는 기독교사회론의 두 번째 과제에 대해 논의할 지점에 이르렀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위에서 설정된 바람직한 사회상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어떤 실천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한국기독교는 권력(국가)과 자본(시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시민사회를 확대시키기 위해 어떤 실천적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대표적 행위자인 NGO와 기독교의 공동체인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NGO와의 관계성이란 측면에서 교회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첫째, 시민운동의 담당자로서의 교회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시민사회의 한 구성요소로서 교회는 시민운동을 수행해야 한다. 특별히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공동체의 제반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NGO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둘째, 시민운동의 내부적 혁신자로서의 교회이다. 시민운동의 목표는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있지 정치권력의 인수에 있지 않다. 시민운동은 제도정치와는 다른 것으로 존재할 때 그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NGO가 정치권에로의 진입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중요하다. 교회는 시민운동이 이런 진입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내부적 비판자 내지 혁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셋째, 시민운동의 후원자로서의 교회이다. 교회는 사회구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혼구원에도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교회는 NGO적 성격을 지니지만 NGO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NGO이면서 동시에 NGO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NGO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교회는 그것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넷째, 시민운동의 주도자로서의 교회이다. 위의 세 정의와는 달리 이 정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판단된다. 세속화된, 즉 비종교화된 현대사회에서 시민운동의 주도세력은 교회가 아니라 세속적인 사회세력이어야 한다. 교회가 시민운동의 주도자가 되는 것은 한국의 다종교상황을 고려해볼 때도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가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간의 화합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는 장기적으로 시민운동의 담당자, 내부적 혁신자,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단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가 시민운동의 내부적 혁신자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에 대한 교계의 의식이나 관심은 현재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추구해야할 중단기적인 목표는 시민운동의 담당자 그리고 후원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시민운동의 담당자로서의 기독교의 활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농촌지역이나 도시의 변두리지역에 있는 지역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한편 시민운동의 후원자라는 측면과 관련해서 현 단계에서 추구될 수 있는 전략적 목표는 교회가 시민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와 이론적 후원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NGO의 최대현안이 재정자립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예산의 적은 부분을 떼어 NGO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이런 재정지원은 시민운동에 대한 대다수 교회의 긍정적 이미지를 고려해볼 때 그리 비현실적인 목표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교회가 시민운동의 이론적 후원자가 된다는 것은 진보적인 교단들과 덜 보수적인 교단들이 사회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사회문제, 특히 사회목표설정의 문제에 관한 교회백서를 발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거시적 목표설정의 부재가 한국시민운동이 지닌 커다란 문제점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현재 우리의 NGO들은 미시적인 담론과 국부적인 사회문제에만 몰두함으로써 장기적인 사회전망의 구축이란 과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백서의 발간은 거시적 목표설정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작업을 통해 종교체계와 학문체계의 연대활동의 통로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4. 교회개혁의 과제

1) 직제화에 따른 성직주의 타파

- 은사공동체로서의 교회상 확립
- 민중적인 성령공동체, 친교공동체 구현

2) 교회의 공동체성 확보

- 제도의 민주화(장로임기제에 대한 이슈화-각교단 총회시 피켓팅 등)
- 평신도의 제자화(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 사회 민주화에 대한 참여(교회의 NGO적 역할, 대안공동체운동)

3) 개교회주의 극복

- 교회연합운동의 밑으로부터의 개혁
- 교권주의자들에 의한 교회연합운동 개혁(지역과 중앙 동일-목사, 장로 중심에서 집사, 평신도, 여성, 청년들의 참여)
- 교단중심이 아닌 지역 중심, 성직자 중심이 아닌 평신도와 함께 하는 지역연합 체 결성

4) 한국신학의 깊이와 실천성 제고.

- 평신도신학자 양성
-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등 서구 신학고전의 번역 작업과 현대화, 대중화
- 평신도 대중을 위한 정론지, 신학월간지 등 간행
- 민중신학의 지평 확대 및 조직신학화 작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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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015년 정기총회자료집 PDF파일    홈관리자 2015/01/25 1993
  2014년 정기총회자료집 PDF파일    홈관리자 2015/01/25 2086
  2013년 정기총회자료집 PDF파일    홈관리자 2015/01/25 1958
  재능교육 촛불기도회 순서지    기독인연대 2012/08/23 2652
  2012.03 오클로스 PDF    홈관리자 2012/03/12 2788
  2012년 정기총회 자료집 PDF    홈관리자 2012/01/29 3521
  2011 평신도아카데미 자료집 PDF    홈관리자 2011/06/15 4766
  2011년 정기총회 자료집    홈관리자 2011/01/29 4893
  정연주선생님 강의 파일입니다.    자유 2010/09/10 4538
  <평신도, 성전을 헐다> 소개    홈관리자 2010/04/16 11964
  생명의 강 4대강은 흘어야 합니다    홈관리자 2010/04/15 4563
  7월5일 FTA토론회 자료    기독인연대 2007/07/19 4635
  4월 19일 한미FTA기독교공대위 토론회    기독인연대 2007/04/20 4411
  교계 한미FTA 대응 긴급토론회    기독인연대 2006/09/06 4343
  KNCC URM 정책협의회 한미 FTA와 도시농어촌선교 7.11    기독인연대 2006/09/06 4518
  기독교사회포럼 "한미FTA 어떻게 볼것인가?" 7.4    기독인연대 2006/09/06 4607
  2006 기독교사회포럼에 참여한 기독활동가들의 결의    기독인연대 2006/05/03 3980
  [펌] 김동한 대표님 글    기독인연대 2006/04/04 4187
  '한국교회의 날' 개최를 위한 토론회 자료집    기독인연대 2005/04/28 4674
  종교개혁연합기념제 설교문(10월 31일 혜화동 거리에서)    기독인연대 2004/12/08 4121
  기독교평신도 운동의 신학적 고찰    기독인연대 2004/11/19 4333
  기독인연대의 방향과 과제    기독인연대 2004/11/19 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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